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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블로그] 나이키(Nike)가 주춤한 지금 뜨는 아디다스(Adidas)와 푸마(Puma) 이야기

by ARO's 2024.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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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Nike)가 주춤한 지금 뜨는 아디다스(Adidas)와 푸마(Puma) 이야기

영원한 이인자였던 아디다스와 요즘 떠오르는 푸마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두 브랜드 설립자가 원래는 형제였다는 사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가족 간의 갈등이 두 브랜드를 글로벌화시켰다.


아디다스와 푸마의 이야기
아디다스와 푸마의 이야기 (출처 : google)

아디다스(Adidas)

아디다스는 1924년 독일 바이에른주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서 아돌프 다슬러(Adolf "Adi" Dassler)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형 루돌프 다슬러(Rudolf Dassler)와 함께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을 운영했지만, 1948년 두 형제의 갈등으로 회사를 분리하게 된다. 이후 아돌프는 자신의 별명인 'Adi'와 성 'Dassler'를 결합하여 아디다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아디다스는 주로 축구화와 트레이닝화를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삼선(Three Stripes) 로고로 유명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포츠 의류, 액세서리, 그리고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도 확장되었다.

 

아디다스는 특히 축구 분야에서의 영향력이 크다. 1954년 독일 축구 대표팀이 아디다스의 축구화를 착용하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브랜드는 글로벌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현재는 다양한 스포츠와 패션 부문에서 폭넓은 제품을 제공하고 있으며,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친환경 제품 개발에도 집중하고 있다.

푸마(Puma)

푸마는 아디다스와 같은 해, 1948년 형제 중 형인 루돌프 다슬러에 의해 설립되었다. 동생인 아돌프와 결별 후, 루돌프는 자신의 회사에 "Ruda"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곧 "Puma"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 푸마는 처음부터 스포츠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점차 다양한 스포츠 용품으로 확장되었다.

 

푸마는 특히 육상축구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였다. 1960년대 올림픽에서 유명 육상 선수들이 푸마 신발을 착용하며 기록을 세우면서 푸마의 명성이 높아졌다. 또한, 1970년대 펠레(Pelé)와 같은 축구 스타들이 푸마의 제품을 사용하면서 축구 팬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아디다스와 푸마 브랜드 로고아디다스와 푸마 브랜드 로고
아디다스와 푸마 브랜드 로고 (출처 : google)

두 형제의 신발 공장

1920년대 독일 헤르초게나우라흐에서 아돌프 다슬러(Adi Dassler)루돌프 다슬러(Rudolf Dassler) 형제는 함께 신발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아돌프는 창의적인 디자이너이자 기술자였고, 루돌프는 영업과 마케팅에 능했다. 이들의 협력 덕분에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은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웬스(Jesse Owens)가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고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명성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갈등의 시작

형제의 갈등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심화되었다. 전쟁 당시 독일이 연합군의 공습을 받을 때, 아돌프와 그의 가족이 루돌프의 가족과 함께 방공호로 피신했다. 이때 아돌프가 "저 나쁜 놈들(그놈들) 또 왔군!"이라고 한 말이 루돌프에게 자신을 가리킨 발언으로 오해를 샀다. 이는 두 형제간의 신뢰에 큰 균열을 일으켰다. 또한, 전쟁 중 루돌프는 독일 군대에 징집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나치 협력 혐의로 체포되었다. 루돌프는 자신이 체포된 배경에 아돌프가 관련되어 있다고 확신하며 그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다. 

아디다스와 푸마 브랜드 이야기
아디다스와 푸마 브랜드 이야기 (출처 : google)

 

아디다스와 푸마의 경쟁

헤르초게나우라흐 마을은 형제 간의 경쟁으로 인해 "아디다스 마을""푸마 마을"로 나뉘었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도 아디다스 혹은 푸마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에 따라 사회적 관계가 결정되었고, 두 회사 직원들끼리는 교류도 거의 없었다.

두 회사는 시장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경쟁적으로 혁신을 도모했다. 예를 들어, 1954년 독일 축구 대표팀이 아디다스의 교체형 스터드가 장착된 축구화를 신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자, 푸마는 더욱 공격적인 마케팅과 기술 개발로 맞섰다. 또한, 유명 스포츠 스타들이 두 브랜드의 신발을 신고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그들의 브랜드 인지도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서로 더 많은 스포츠 스타와 협력하기 위해 경쟁했다.

화해 없는 끝

형제의 갈등은 끝내 해결되지 못했고, 아돌프와 루돌프는 평생 서로를 경쟁자로만 여기며 살아갔다. 두 형제는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고, 심지어 사망 후에도 같은 묘지에 묻히지 않고 마을의 양쪽 끝에 각각 묻히는 것으로 그들의 대립은 끝났다. 이러한 갈등과 경쟁은 아디다스와 푸마가 각각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아디다스와 푸마의 시작이 단순한 오해에서 일어난 두 형제의 갈라섬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두 형제가 아니었다면 두 브랜드 역시 만나지 못할 것이었다라고 생각되면서도 동시에 두 형제가 같이 운영하는 브랜드였다면 아디다스와 푸마를 넘어섰던 브랜드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나이키가 주춤하는 요즘 두 브랜드의 성장세는 어마어마하다. 패션업계의 판도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지금도 너무 재밌다.